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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어설픈 시인의 서울살이 (15) 보리밭과 보릿고개

바람이 쓰고 청보리가 말하다

어설픈 시인의 서울살이 (15) 보리밭과 보릿고개



[서울톡톡]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보면 아무도 뵈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오래 전에 유행했었고 지금 들어도 정다운 노래다. 요즘 같은 5월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수북하게 자라있는 푸른 보리밭에 들어서면 어디선가 들려올 것 같은 낭만이 넘쳐나는 노래다. 바람에 따라 넘실거리는 보리밭의 푸른 물결은 벼의 푸름과는 또 다른 정감으로 낭만에 젖어들게 한다.



보리밭의 풍경은 크게 네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초봄의 파릇파릇 돋아난 보리밭의 풍경이다. 이 시기의 보리 잎은 달착지근한 맛과 비타민이 풍부하여 밀가루 반죽 부침개와 국거리로 많이 쓰였다. 두 번째 시기는 보리가 수북하게 자라 봄바람이 불면 푸른 물결로 일렁이는 시기다. 세 번째 시기는 보리가 다 자라 여물어가는 시기. 마지막으로 네 번째 시기는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는 6월 초중순의 풍경이다. 지금은 우리 서울이나 가까운 주변에선 귀한 풍경이 되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었다.


낭만이 넘쳐났던 옛 시절의 보리밭


보리밭 연가
이승철
 
누가 있다고, 누가 본다고 
들판을 휘둘러봐도 
아무도 없는 푸른 물결뿐. 

가시내도, 가시내도 참 
왜 자꾸만 어쩌자고 
키 자란 보리밭 
고랑 길로 내달릴까 

숨결 쌔근쌔근 가쁜 숨 몰아쉬며 
발그레한 얼굴로 주저앉은 밭두렁엔 
제비꽃 민들레 꽃 괜스레 수줍고 

하늘에는 종다리가 
나는 봤지 나는 알지 
종알종알 쫑알쫑알 
너울너울 아지랑이처럼 소문이 무성한데.


이맘때쯤 보리밭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소리가 하늘 높이 날아올라 지저귀는 종달새의 노래다. 요즘은 아주 보기 어렵지만 옛날엔 종달새도 아주 흔한 새들 중의 하나였다. 종달새들의 번식을 위한 보금자리가 바로 보리밭이나 밀밭이었다. 또한 농촌 처녀 ․ 총각들도 만남의 장소로 보리밭과 밀밭의 밭고랑, 밭둑을 많이 이용하곤 했다. 지금의 보리와 밀은 개량종으로 키가 작은 편이지만 옛날의 밀과 보리는 키가 훌쩍 커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에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힘겹게 넘어야 했던 '보릿고개'


그러나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1960년대 초반까지 이맘때는 결코 낭만을 즐기는 여유로운 시기가 아니었다.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가난한 농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릿고개'가 바로 요즘이었다. '보릿고개'는 지난해 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모두 바닥이 나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아 먹을 것이 없던 5~6월을 일컫는 말이었다. 다른 말로 '춘궁기(春窮期)' 또는 '맥령기(麥嶺期')라고도 했다.


지금의 젊은이들에게는 전혀 낯선 말이지만 그 시절의 보릿고개는 가난한 농민들이 살아남기 위해 넘어야했던 참으로 절박한 고개였다. 식량이 떨어진 가난한 농민들은 산과 들의 나물과 풀뿌리, 나무껍질 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러나 굶주림이 너무 극심해지면 아직 완전히 여물지 않은 보리이삭을 베어 임시 식량으로 먹기도 했다. 보리 수확량에는 많은 손실이 되었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시기에는 구걸을 하거나 빚을 얻어 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지금은 거의 잊혀진 말, '보릿고개'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가난한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가슴 아픈 역사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 모진 시련을 이겨내고 잘 사는 오늘을 일궈낸 주인공은 바로 우리 국민들이며 60대 이상의 노인세대들이다. 그러나 지금도 가난에 허덕이며 힘든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다. 그래도 옛날의 보릿고개만 하겠는가. 과거에 힘들게 넘어왔던 보릿고개를 회상하며 오늘을 극복하고 미래를 열어가는 지혜와 인내를 발휘할 때다. 그리고 사랑과 나눔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더불어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참된 저력일 것이다.


이승철 시민리포터는 시인이다. 스스로 '어설픈 시인'이라며 괴테 흉내도 내보고, 소월 흉내도 내보지만 "나의 시는 항상 어설프다. 불후의 명작을 쓰겠다는 욕심은 처음부터 없었고 그저, 더불어 공감하는 보통 사람들과 같이 숨 쉬고 나누는 것을 만족할 뿐"이라고 한다. 이 어설픈 시인이 서울살이를 하며 보고 느낀 삶의 다양한 모습, 역사와 전통 등을 시인 특유의 문체로 써내려 간다.


출처 : 서울톡톡 http://inews.seoul.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