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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어설픈 시인의 서울살이 (8) 94회 삼일절을 맞으며

TV로만 보니 의미가 없어요!

어설픈 시인의 서울살이 (8) 94회 삼일절을 맞으며






[서울톡톡]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과 함께 우리나라 4대 국경일 중 하나인 3.1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3.1절엔 의미를 깊이 새기며 국기를 꼭 게양할 생각이다. 필자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몇 년 전 관할구청으로부터 국경일에 국기게양을 잘하는 아파트로 지정되고 표창까지 받았는데, 근래 들어 국기게양을 하는 가정이 많이 줄어들어 아쉬운 모습이다.


며칠 전 필자가 나가는 교회 임원들과 함께 서울근교의 나지막한 산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이번 3.1절에 기념등반대회를 하기 위해서다. 교회의 3.1절기념등반대회의 역사는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뜻있는 몇몇 회원들이 3.1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기념등산을 하자고 하여 처음에는 10여 명의 사람들이 함께 했다.



그렇게 시작된 3.1등반대회 참가자가 점점 늘어 작년엔 100여 명이 넘는 교우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등반대회라 하여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은 아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나지막한 산에 오른다. 참가자들이 초등학생 어린이에서부터 80대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기 때문이다.


3.1절기념등반 행사는 일단 산위에 올라 예배설교를 통하여 3.1절의 역사와 의미,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가져야할 마음가짐과 행동을 함께 생각한 후, 애국가와 3.1절 노래, 순국선열들에 대한 묵념, 독립선언서 낭독, 그리고 만세삼창으로 끝을 맺는다. 산에서 내려온 후엔 근처 음식점에서 점심을 함께 들고 목욕과 저녁식사 등 친교활동의 시간을 갖는다.



"기미년 삼월일일 정오, 터지자 밀물같은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곳곳마다 삼천만이 하나로, 이날은 우리의 의요, 생명이요, 교훈이다, 한강물 다시 흐르고 백두산 높았다, 선열하 이 나라를 보소서, 동포야 이 날을 길이 빛내자."


"우리 조선은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똑똑히 밝히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도록 하노라~"


기념행사에서 모두 일어나 애국가를 부르고 3.1절 노래에 이어 묵념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동안 참가자들의 표정은 자못 숙연하다. 그런데 이 행사에 해마다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특별한 노인이 한 분 있다. 노인은 올해 86세인데 꼭 대형태극기를 들고 산을 오른다. 대형 태극기는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있다가 만세삼창을 할 때는 커다란 태극기를 크게 휘날리며 만세를 부른다.



"3.1절은 특별하지요.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 얼마나 압박을 받았습니까? 자주독립하겠다고 목숨 걸고 독립만세를 부른 날인데요, 일본은 지금도 우리 땅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사과도 안하잖아요?"


"옛날엔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학교마다, 시골에서는 면단위마다 기념행사를 했는데 요즘은 중앙에서만 간단히 하고 텔레비전으로만 보여주니 너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에서라도 이렇게 함께 산에 올라 기념식을 하는 것이 참으로 좋습니다, 저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도 좋을 것 같고..."


지난해 3.1절기념등반대회 때 산에 올라 기념식을 마친 후 노인 두 분과 나눈 대화다. 노인들의 말처럼 젊은 부모 손을 잡고 산에 오른 어린이들도 3.1절의 의미는 깊이 새기고 있었다. 아빠와 함께 행사에 참가한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는 참으로 똑똑했다.


"3.1절은 1919년 3월 1일 정오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우리민족이 일제의 압박에 항거하고 전 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태극기를 들고 일어나 평화적 시위를 전개한 날이잖아요?"


노인들과 초등학생의 말처럼 3.1절은 우리민족이 결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날이다. 1910년 8월 22일 일제에 의하여 강요된 병합조약으로 우리 한국은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라는 식민지 최고통치기구를 만들어 한국사회를 식민지 지배구조로 재편하기 위한 폭압적인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그러던 중 손병희가 앞장선 천도교 측 인사들과 이승훈 등 평안도의 기독교계 인사들이 국내에서의 독립선언을 계획했다. 여기에 불교계의 한용운 등이 동참하여,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 등 3개 종교계가 국내 독립선언의 주축이 되었다. 2월 27일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되었다. 기독교에서는 인사동 승동교회에서 학생들이 비밀리에 모여 독립선언서 배포에 앞장섰다.


드디어 3월 1일(고종의 장례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 진남포,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식이 개최되었으며 전국적인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은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의 취지를 밝힌 다음 바로 일제 경찰에 자수했다.


민족대표들은 본래 독립선언식을 인근 탑골공원에서 거행하기로 학생들과 약속했었다. 그러나 공원에 모인 학생, 시민들이 전면적인 시위에 돌입하여 비폭력 원칙이 무너질 경우, 열강의 호의를 얻어내지 못할까 염려되어 장소를 바꾸었던 것이다. 결국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들은 독립만세의 함성을 외치며 종로거리에 시위대열을 이루었다.


3월1일 이후 주로 대도시에서 전개되던 만세시위는 각 지방의 중소도시와 농촌으로 확산되었다. 만세운동은 5월까지 이어졌고,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는 동시다발적이고 격렬한 투쟁양상을 보여 최고조에 이르렀다. 전국을 휩쓸었던 만세운동 상황을 살펴보면 집회 횟수 1,542회, 참가인원 202만3,089명, 사망자수 7,509명, 부상자수 1만5,961명, 피검자수 5만2,770명, 불탄 건물은 교회 47개소, 학교 2개교, 민가 715채나 되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민중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난 그날의 함성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결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될 것이다.


이승철 시민리포터는 시인이다. 스스로 '어설픈 시인'이라며 괴테 흉내도 내보고, 소월 흉내도 내보지만 "나의 시는 항상 어설프다. 불후의 명작을 쓰겠다는 욕심은 처음부터 없었고 그저, 더불어 공감하는 보통 사람들과 같이 숨 쉬고 나누는 것을 만족할 뿐"이라고 한다. 이 어설픈 시인이 서울살이를 하며 보고 느낀 삶의 다양한 모습, 역사와 전통 등을 시인 특유의 문체로 써내려 간다.


출처 : 서울톡톡 http://inews.seoul.go.kr